Artist’s Note

<영원의 소리 / Sound of Eternity> 그림에 부치는 글

2023년 6월 30일

‘아완’이라는 말을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감상’한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하였는데, 사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평온한 마음으로 돌 보듯, 물 보듯 관찰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단 불같이 화가 난 마음은 꺼트려 진정시켜야 할 것이고, 서운한 마음에 꽁꽁 얼어붙은 마음은 미지근하게 녹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뜨뜻미지근 한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니었잖아?’하고 어디가 문제였는지 찬찬히 살펴볼 수 있을 테니까요. 맛있는 커피를 내리기 위해 적당한 온도의 물이 필요하듯, 진심을 우려내기 위해서도 마음의 적당한 온도가 필요한 일입니다.

저는 그런 마음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마구 뒤섞여 휘몰아치는 감정과 생각중 무엇이 변하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고 또 무엇이 변치 않을 것인지 가려내려고 애를 씁니다. 먼저 화나고 서운한 감정 같은 매캐하고 찝찝한 기운이 빠져나가도록 마음에 환기를 시킵니다. 또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거나,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고 그것을 움켜쥐느라 잔뜩 긴장했던 마음의 근육을 이완시킵니다. 무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다면, 그것을 굳이 들추어 치우려 하기보다는 달리기나 산책처럼 신체적인 활동으로 마음의 무게를 조금 가볍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허무’나 ‘외로움’ 같은 감정들은 바꿀 수 없는 근본적인 조건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여러 노력을 하다 보면 어느새 미간에 뭉쳐있던 주름이 스르륵 펴지고, 움츠린 어깨도 조금 가벼워진 듯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며,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제야 진짜 나의 마음, 변치 않고 늘 거기에 있던 나의 마음, 영원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아완 我玩 / Mind collector>전시에 부치는 글

2023년 4월 10일

나의 마음은 강가에서 주어 온 돌 같습니다. 어딘가는 닳고 닳아 반들반들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고, 어느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올라 까슬까슬 만지면 생채기가 날 듯 위험해 보입니다. 나는 그렇게 내 마음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만져보기를 좋아합니다. 돌 표면에 그려진 겹겹의 무늬처럼, 내 마음에도 다채로운 시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돌처럼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마음은 변화하지 않아 안전하지만 오래 보면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는 물을 바라봅니다.

나의 마음은 물 위에 비친 달빛과도 같습니다. 틀림없이 하나인 것에서 출발한 불빛이 출렁이는 물결에 따라 무한하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마치 마음이 변화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무한하게 변화하는 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엇을, 나의 마음을 바라보는 일은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을 갖게 합니다. 파도가 바람과 땅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것처럼, 나의 마음도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파도에 깊이 있게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끝없이 변화하는 마음을 바라보는 일은 틀림없이 즐거운 일이지만, 계속해서 흔들리는 것을 관찰하다 보면 또 멀미가 나기 마련입니다. 나는 그래서 나의 마음을 돌처럼 보기도 하고 물처럼 보기도 합니다.

나의 감정을 홀로 바라보는 일이 따분하게 느껴지거나, 어지럽게 느껴질 때, 나는 사려깊은 다른 감상자를 초대합니다. 나와는 다른 미감으로 어둡고 밝은 다양한 마음을 수집해 온 또 다른 마음 수집가, 마음 관찰자를 초대합니다. 그와 함께 내 마음을 바라보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 잘 보이는 곳에 그려진 멋진 무늬에 대해 설명할 때에도, 잘 보이지 않는 귀퉁이에 난 못생긴 돌기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도, 그 세심한 감상자는 적절하게 칭찬해주고 또 격려해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짝이는 것에 정신이 팔려 풍덩 빠지려 할 때에는 소매를 꽉 붙들어 줄 것이고, 흔들리는 이미지를 쫓다가 한없이 떠내려갈 때에는 길을 잃지 않도록 좌표가 되어 줄 것입니다.

<Why I Draw> 전시에 부치는 글

2022년 11월 21일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라는 질문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그리는 일을 스스로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좀 더 어렸을 때, 그림 그리기가 아니라 글쓰기에 더 관심이 많았을 때, 아는 지인분으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았었다. ‘너는 왜 그렇게 글을 쓰니? 그때는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요-‘ 라고 대답했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좋아하는 그 사람이, 한 사람에서 가족으로, 친구들로, 특정 세대 연령의 관객들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로, 더 나아가 미래에 내 그림을 만나게 될 관객까지 점차 넓어지는 것만 달라졌달까.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고 또 가장 듣고 싶은 칭찬이 있다면 아마도, ‘나도 이런 기분 느낀 적 있어!’라는 말을 듣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세계 곳곳에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가졌던 사람들에게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가장 큰 동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는 다른 중요한 동기가 있다면 아마도, 마치 각자 바쁜 하루를 끝내고 자신만의 편안한 동굴로 들어가듯, 그림 그리기가 나에게 가장 편안한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 그리느라고 힘들어서 어떻게 하냐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오히려 그림 그리기가 나에게는 쉼이고 멈춤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더 정확하게는 물을 묻힌 붓을 먹물에 찍어 종이 위에 스윽 첫 획을 그을 때 나는 소리와 냄새, 그 모든 것들을 너무나 사랑한다. 나에게는 그 모든 과정들이 달리기나 화초에 물 주기, 차를 끓여내는 등의 반복적이고 명상적인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그림 그리기 행위는 나에게 명상이고 수련이며, 자가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이토록 나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 내가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고, 나의 작품으로 인해 누군가가 위로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은 일 일것이다. 나아가 다른 창작자가 나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더 좋은 창작물을 생산에 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스밈> 전시에 부치는 글

2022년 10월 24일

나는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당신에게 스미는 일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자유를 구하는 일입니다. 꽉 움켜쥐고 빼앗기지 않으려 애써야 하는 자유가 아니라, 홀연히 놓아버려 더 이상 지켜야 할 이유가 없는 자유입니다. 그런 자유를 얻게 되면, 마치 투명한 병 안에 가득 차 있던 물감이 깨끗이 비워져, 세상으로부터 물병이 분별 되어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것처럼, 나는 여기 분명 딱딱하게 존재하지만, 세상에서 구별되지 않아 부드럽고 자유로울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향유하면서도 나 자신이 뾰족하게 모나지 않아 누구도 해치지 않게 될 겁니다. 누구도 해칠 이유가 없어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은 세계는 무척 자유로운 세계일 것입니다. 그런 자유에 이르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나를 채우고 있던 색을 바깥으로 흘려보내 내부를 비워낼 것입니다. 그 도드라진 색이 세계에 더욱 잘 스미도록세계를 향해 나를 활짝 열어두고 바짝 밀착시킬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나와 세계 사이에 당신이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 비로소 나 자신을 세상에 유출시키고 동화되어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입구이자 출구입니다. 나 역시 당신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통로가 되어 줄것입니다. 나는 지금 그 입구에 서서, 당신과 나의 스밈을 바라봅니다.

<Vanguards of The Cosmos> 전시에 부치는 글

2022년 7월 3일

낮 동안의 세계에서 나는, 나의 정신은, 나의 외부와 분리된 존재인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맙니다. 내부에 격리된 채 가시광선이 투사하는 휘황한 것들을 향유하기 바쁩니다. 그러면서 내 정신이 원하는 대로 내 몸과 내 주변 세계로 나의 의지를 확장해 조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 그리고 그 세계로부터 언제든 나를 가두고 분리해 혼자될 수 있다는 착각. 미끄덩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와 섞이지 않을 수 있다는 착각. 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태양이 비추던 분절된 세계의 장막이 걷히고 마침내 스탠드 불빛을 끄고 나면, 이내 나의 정신이 내 방 벽을 넘어, 밤의 도시를 지나, 세계와 연결됨을 느낍니다. 나의 정신은 모든 것과 뒤섞여버리고 꼭 잠가두었던 문은 활짝 열리고 나는 아무것도 조절할 수 없게 됩니다. 어쩌면 수억 광년 떨어진 별자리와도 즉각 동기화된 것만 같은 예민한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낮과 밤이 매일 순환하며 바뀌는 것처럼 내 마음도 늘 그렇게 닫히고 열리고, 열려있으면 닫아두고 싶고, 닫혀있으면 열어두고 싶어집니다. 사실, 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단절시켜 구경하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편이 더 쉽고 안전하긴 합니다만, 나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세계를 바라보기만 하는 일은 무척 따분한 일입니다. 그 세계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나와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베란다 창틀에 앉아있는 고양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그런 해탈의 경지가 아니고서냐, 그런 권태를 이겨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나의 외부, 무한이 뻗어있는 우주 방향으로 열어젖히고 그 안으로 나의 정신을 쏟아 흘려보내고 마구 뒤섞어 원래의 나인지 너인지 세상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무無화 시키고 싶은 그런, 마음에 대해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나와 당신은 틀림없이 다른 우주를 겪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우리는 서로의 우주를 향해 마음을 열고 침범하고 충돌하며 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영원히 흥미롭고 새로운 우주를 발견하거나 탄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Fairy Tale> 전시에 부치는 글

2022년 6월 20일

충만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습니다. 그 충만함이란, 빈 그릇을 가득 채워 느낄 수 있는 풍족함이라기보다, 불필요한 것들을 적당히 비워내 가뿐해졌을 때 느낄 수 있는 쾌적함에 가깝습니다.

달리기할 때 처음 몇십분 동안은 관절과 근육에 피로를 느끼며 달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내 몸이 별다른 저항 없이 저절로 달려 나가고 있구나-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종아리에 쌓이는 피로와 가쁘게 차오르는 숨은 엄연히 매 순간 닥쳐오는 분명한 현실임에도 그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그 순간 느껴지는 희열과 자유로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살다 보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다르게 흐르는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내가 가려는 길목마다 장애물이 잔뜩 쌓여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만, 요즈음의 저는 그런 장애물도, 역행하는 주변의 일들도 다 반갑기만 합니다.

산다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든 움직여야만 가능한 일이고 또 움직이는 만큼 어딘가 변해야만 삶을 지속하는 것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무엇일거예요. 살고자 한다면 움직여야 하고 변해야 하는데 나를 움직이게 하고 변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다면, 그 무엇이든 나를 살게 하므로 좋은 것입니다.

움직이고 변화할 수만 있다면, 조류를 거슬러 올라갈 때 느끼는 근육의 피로나 장애물을 뛰어넘을 때 관절에 쌓이는 충격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무엇이건 삶의 반대편에 있는 그 무엇보다는 나은 것일 테니까요.

<Face to Face> 전시에 부치는 글

2022년 2월 18일

당신과 나, 우리의 관계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점점 복잡하고 미묘하게 변해갈 거예요. 또 서로를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당신과 나를 나누는 경계는 점점 모호하고 흐릿하게 변해갈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먼 미래에는 나와 당신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지경까지 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완전히 잃어버린 채 말이지요. 아, 관계란 두렵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과 나의 관계를 조금 멀리 떨어져 단순하게 바라보기로 했어요.

나와 당신이 먼발치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장면에서부터 서로를 알아보고 한 걸음씩 다가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 장면까지를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지요. 어떤 무언극을 감상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것은 아마도 무대 위에 등장한 두 사람이 슬며시 다가와 서로를 만지고 탐색하고 끌어안고 또 밀쳐내 멀어지기도 하는 아주 느리고 연속적인 행위들의 반복일 뿐일 거예요. 무의미해 보이는 그런 행위의 반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마도 나는 그들의 몸짓에 내포된 의미를 찾으려 하기보다 그 둘의 몸짓이 서로 겹치고 비켜나며 만들어내는 다양한 곡선과 면의 변화를 감상하게 될 것 같아요.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면과 그림자가 져 어두운 면이 서로 이어지고 떨어질 때 반짝이는 몸의 빛깔은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다울까요. 무한하게 출렁이며 해안가에 부딪히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처럼 즐거운 일일 거예요. 시각적인 즐거움이 아니라면, 청각이나 촉각, 후각을 동원하여 바라보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내는 리드미컬한 발소리, 열기가 달아오르고 식을 때 나는 체취, 그들이 부딪칠 때마다 쓸리고 출렁이는 살의 움직임, 그런 것들을 관찰하는 일은 정말이지 지루할 틈이 없는 일일 거예요.

당신과 나의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사건은, 미묘하고 모호해서 파악하기 힘든,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감정과 감정의 충돌만이 아닙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 이전에, 그보다 더 실재적인 몸과 몸의 만남이기도 한 것이지요. 당신과 내가 만날 때,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마음과 마음의 관계성 때문에 두려워하기보다, 내가 느끼는 소리와 감촉, 시각적인 즐거움에 대해 먼저 집중해보려고 해요. 그렇게 하면, 우리의 관계가 우리의 만남이 조금은 쉬워질지도 모르니까요.

<구도 II / Composition of Us II> 작품에 부치는 글

2021년 11월 23일

예전에는 그림에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할지, 그 의미가 과연 나에게, 관객에게 유의미 한지, 의미는 어디까지 감추고 또 공개해야 할지, 하는 문제들에 대해 고민했었어요. 의미 없어 보이는 즉흥적인 그림들은 무의미하고 자위적이며 무책임하다 여겼으니까요. 그런데 요즈음엔 나도 의미를 담지 않은 그림에 대해 생각합니다. 의미를 담으려 의도하지 않아도, 의미는 관객에 의해 어떻게든 발견되고야 마는 것 같더라고요. 내가 말을 먼저 꺼내지 않으면 상대방이 먼저 그 허전한 여백을 메꾸려고 입을 떼고 마는 것처럼요. 그렇다면 의미가 빠진 그림 앞에 관객을 서 있게 해야 할 구실은 무엇인가-하고 생각합니다. 늘 무언가에 바쁜 당신이,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 앞에 서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만들 방법은 무엇인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요란하게 소리치지 않아도 그 앞에 잠시 머물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비법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더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성껏, 시간을 담아, 아름다운 구도의 그림을 그리는 것 이외에는 아직 달리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는 가까운 사이 / Close and Closed> 작품에 부치는 글

2021년 7월 27일

가장 가깝고 가장 먼, 가장 내밀하고 가장 소원한, 그런 관계, 그런 사이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괜히 멋져 보이려고 자꾸만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요. 이런저런 경험을 하다 보니, 좋은 것과 나쁜 것,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요. 그래서 점점 ‘나만의 것’이라는 것이 따로 없는 - 아무렴 어때 - 무색무취의 인간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원하는 것을 잘 몰라 결정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와는 다르게, ‘무엇이든 괜찮아’라고 생각하다 보니,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오히려 편리하기까지 해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두고 독특한 ‘취향’을 갖는다는 것이 참 소모적이고 번거로운 일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부터 그런 태도를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내면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감정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무언가에 극도로 분노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고요. 집요하게 무언가를 손에 넣고 싶다가 어느 순간 냉담해지기도 합니다. 행복하고 충만한 감정과 허무하고 슬픈 감정은 거의 언제나 아주 얇은 경계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나타나며, 다른 두 마음의 경계를 지나는 나는 늘 중심을 잡느라 애를 먹습니다.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그 얇은 박막의 경계 어딘가에 나라는 사람을 규정하는 어떤 커다란 힌트가 있음을 직감합니다. 위의 그림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해버린 것 같네요. 아무튼, 그런 것들에 대해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각자의 도와 생 / Each and Every Life> 작품에 부치는 글

2021년 10월 23일

나와 당신 사이. 가장 편안한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입니다. 편안하다는 것은 주관적이어서, 어떤 이는 타인과의 거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완전한 합일의 상태를 가장 편안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다만 그림을 그리는 입장에서 여기 여섯 명의 친구들이 가장 편안하게 보일 수 있는 구도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동양화를 처음 배울 때 우리는 화면 안에 몇 개의 돌덩이, 몇 가닥의 풀잎을 그려보며 연습합니다. 마치 바둑알을 놓듯 하나의 돌멩이 옆에 또 하나의 돌멩이를 그리며, 과연 어디에 둘 지, 고심하는 과정이지요. 그 돌이 셋이 되고 열이 되고 백이 될지라도 술술 막힘없이 그려나갈 수 있는, 그런 경지.-에 이르기 위한 훈련일 겁니다. 돌이든 풀이든 나무든, 배우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듣는 핀잔은 ‘거, 너무 빽빽해서 바람 한 점 통하지 않겠네!‘일 겁니다. 그런 가르침은 너무도 강력해서, 어떤 그림을 그릴 때건 마음 한켠에는 늘 ‘통풍’을 신경 쓰게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해요.

이 여섯 친구들 사이사이에도 그렇게 바람이 잘 통하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흑색과 백색 사이로 선과 선 사이로 어디로든 말이죠. 사실 요즈음 나에게 그런 친구들이 몇 있습니다. 각자가 일궈온 아름다운 도형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서, 각자 자신이 세워온 삶의 원칙들을 인정해주며, 서로를 지켜보며 그렇게 그저 함께 ‘있는’ 그런 쾌적한 관계의 친구들 말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그려보고싶었던 것 같아요.

<물아 物我 / In the zone> 작품에 부치는 글

2021년 7월 9일

나에게 물아(일체)의 상태는, 내가 나와 홀로-함께 있어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 순간은 너무 짧아서 지나고 나면 꿈처럼 달게 느껴져요. 끝없이 변화하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도 그와 비슷한 체험을 하게 합니다. 저에게는 쉼 없이 움직이는 나의 손을 바라볼 때, 그 손에 쥐어진 붓끝을 바라볼 때, 그 붓끝에서 무수히 많은 빗금이 스며나오는 것을 바라볼 때, 걱정하는 나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끝없이 움직이는 무언가가 없을 때에는, 끝없이 움직이는 마음을 바라보는 것도 어쩌면 재미있을지 모르겠어요.

<무거운 사이 / Discontinuity Between Us>

2021년 7월 4일

당신과 나 사이, 그 틈은 과연 텅 비어있을까요. 혹, 연속적인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오히려 그 틈의 주인이 주체가 되어 당신과 나를 당기고 밀어내는 작용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요. 그 운동의 주체가 무엇이든, 그 사이가 가득 채워져 있다면, 우리가 서로를 개별자로 구분 짓게 하는, 그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피부에, 우리의 내장에, 우리의 세포에- 아니면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 그 저편 어딘가에 있는 것일까요. 과연 ‘어디’로 부터를 너와 다른 ‘나’로 분절하여 부를 수 있는 것일까요. 그 경계가 어디에 있기에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는’이라는 주어를 선포하며, ‘너와 다르다-‘ 혹은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런 질문들에 대한 그림입니다.

<Shadow Esquisse - 5월의 그림자> 전시에 부치는 글

2021년 5월 8일

이것 봐, 불안이 또 어느새 여기 와 있네. 그림자처럼, 내가 비추이는 어디에든 불안이 드리워져. 내가 바라보지 않는 순간에도 불안은 거기 있을 것만 같아. 가끔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있어. 하지만 그 순간은 어찌나 짧은지. 그 느낌이 사라져버릴까 두려워 이내 불안해 져 버려. 대낮의 햇빛 아래에서 그림자를 돌돌 말아 가방에 넣을 수 없는 것처럼, 불안을 거두어버리고 온전히 행복만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일까. 마치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과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영원히 순환하기만 하는 불면의 밤처럼, 서로 다른 두 감정은 서로 번갈아 가며 나를 차지하고 도망치기만 해. 맴도는 그 감정의 회전을 멈출 수는 없을까. 그 둘을 떼어낼 수 없다면, 시간을 지연시 켜 볼래. 행복이 한 손에 쥐어졌을 때, 불안이 찾아올 것을 염려하기보다, 둥글고 따뜻한 행복이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그 보드 라운 감촉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다면, 지금 여기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다면, 그래, 어쩌면.

<원하고 원치 않는다 / I want and I don’t want> 작품에 부치는 글

2021년 1월 12일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주로 당시에 두서없이 써놓은 낙서를 읽어보곤 해요. 온갖 선동적인 말투로 적어 놓은 원대한 계획과 다짐들은 광속으로 탈락시키고, ‘나는 오늘 왜때문에-‘ 류의 신세 한탄 글도 역시 금방 스윽 넘겨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비교적 덤덤-담백한 읽을 만한 문장들이 보입니다. 그 문장들을 읽고 정리해서 금언처럼 최종적인 문장을 찾아 나가려 하는 중에, ‘나는 원하며 또 원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2008년 무나씨 시리즈의 단초가 되었던 어떤 생각을 십년이 지난 오늘 내가 하고 있었으니까요.

처음으로 진지하게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던 2008년 겨울 무렵. 나는 무척 외로웠던가 봐요. 누군가와 친해지고 그 누군가에게 외로운 마음을 내보이고 구출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막상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또 냉정하게 거절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츤데레같은 성향 덕분에 많은 사람을 본의 아니게 괴롭히며 살아왔지만... 그런 참담한 이야기보다, 그 모순된 마음 자체에 대해 주목하고 그것을 표현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잘은 몰랐지만, 내가 포착한 그 마음의 상태가 아주 특별하다고 느꼈고, 그 특별한 것을 잘 그려낼 수 있다면 좋은 그림이 될거라 생각했거든요. 마치 검정과 흰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한하다고 믿는 것처럼, 그런 양가적인 마음으로부터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가짓수도 무한하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원하며 동시에 원하지 않는’ 그 심란한 마음 상태 속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의 모든 씨앗이 다 들어있다고도 생각되어요. ‘원하며 원하지 않는’ 마음에서 행복과 불행의 조건들이 생겨나고, 선택이 임박해서는 막연한 불안, 흥분, 기대와 같은 감정들이 끓어오르고, 막상 선택한 다음에는 선택받지 못한 옵션이 주는 미련, 갈등, 후회 같은 감정이 생겨나기도 하니까요.

어쩌면 애초에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상황에 자신을 빠뜨리지 않을 수 있다면 이런저런 감정들에 휘둘릴 일이 없을지도 모르죠.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고정된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며, 어차피 남는 것은 ‘고통’일 뿐이니, 어리석은 인간들아! 욕망을 버려라-고 수천년 전 현자들 (feat. 헤라클레이토스, 노자, 붓다) 이 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거예요. 하지만 그런 깨달음 알고, 추구하려 해도 나는 그 절대적인 평정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임을 아는 것도 괴로운 일인걸요.

그러니 ‘원하고 원하지 않는’ 그 마음 상태, 혼돈을 받아들인 채, 무한한 가짓수의 가능성을 담고 있어 들끓는 마음을 감격스럽게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양자조차도 여기에 있거나 저기에 있거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하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이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아무 / moo nothing> 전시에 부치는 글

2020년 12월 18일

문득, 하던 일이 허무하게 느껴지거나, 일상이 무료할 때 나는 산책을 하거나 달리기를 합니다. 걷거나 뛰며 마주치는 사람, 동물, 나무를 바라보는 것이 무척 즐겁습니다. 개는 킁킁-거리며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를 쫓아다니고 고양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늘 골똘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바삐 어디론가 걸어가고 나무들은 햇볕과 수분을 주의 깊게 살피며 자신의 생장에 집중하고 있지요. 무엇에든 집중하고 있는 존재를 보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아름다운 존재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그런 세계를 거닐다 보면, 나는 시선을 나 자신에게 돌리고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가 나의 삶에 집중하고 싶어집니다. 나도 나무처럼 나의 생장에 더 신경을 쓰고 강아지처럼 킁킁거리며 좋아하는 것을 발발 쫓아가며 고양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에 골몰하고 싶습니다. 나도 그런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나를 나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드는, 자신에게 몰두한 그런 존재들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 아무 것에도 도무지 관심이 없는 그런, 자기의 세계에 몰두한 존재들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허무를 느낄 때 이 그림들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